계획 없이 흘려보낸 제주의 일상

비워둔 하루, 그 자리에 남은 여백

제주 한달살이의 시간은 바라던 대로 느슨하고 고요하게 흘러갔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부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빠듯하고 정해진 일정 대신, 그날의 기분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촘촘하게 채워져 있던 일상의 리듬을 비워내자,
그 자리에 이전과는 다른 감각들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하루는 맞춰놓은 알람 대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질 때 시작되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이 하루를 여는 순간은 반복되어도 지겹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집에서 편히 머무는 시간,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순간,
그때그때의 감정이 하루의 방향을 정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비워둔 하루를 흘려보내다 보니,
우리 가족의 속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빠르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함께 그 속도를 버텨내야 했던 아내도,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던 아이도,
조금씩 자기만의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채워져 있던 시간 대신,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귀포 시골 동네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제주 한달살이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이 곳의 독특한 생활 리듬이었습니다.

동네 카페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오후 5시 정도에 문을 닫는 곳이 많았습니다.
조금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문 연 식당을 찾지 못해 헤맨 날도 있었습니다.

서울의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영업시간에 익숙했던 저에게는
처음엔 꽤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달살이의 중간쯤이 되자,
그 불편함 속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하루를 길게 붙잡기보다는,
적당한 시간에 문을 닫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리듬이 이 섬 전체에 잔잔하게 스며있는 듯했습니다.

어쩌면 ‘시간부자’라는 삶의 모습은,
이미 이곳 사람들의 일상 속에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다른 표정으로 말을 거는 제주 바다

제주 한달살이 동안
우리 가족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은 바다였습니다.

아들이 바다를 참 좋아합니다.
수영도 못하고 물속에 들어가지도 않지만,
파도를 보고 해변에서 노는 걸 참 좋아합니다.

저는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별로 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들과 함께 바다를 찾는 시간이 꽤 즐거워졌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어질 때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러 해변에 가볼 수 있다는 점은
제주에서의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바다임에도
해변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어서,
갈 때마다 새로운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더 좋았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거의 매일 바다를 찾고 있었습니다.


돌담길을 걸으며 느낀 여유

숙소는 다소 외진 곳에 있었지만,
일부러 차를 두고 가족과 함께 먼 길을 걸어 외출을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제주 특유의 낮은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시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어디를 가기 위해 서두르기보다
걷는 시간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과정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늘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움직이던 일상과 달리,
이곳에서는 내 발걸음의 속도에 맞춰 하루가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비워둔 시간들이 더 이상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여유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우리의 하루를 조금씩 다르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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