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첫날, 명함이 사라지자 보인 것들

언제 잠이 들었든 배려 없이 같은 시간에 울리던 휴대폰 알람 소리. 하나같이 출근하기 싫어하는 표정의 사람들 속에 섞여가던 출근길이 매일 아침 몸이 기억하는 당연한 일과였습니다.

하지만 퇴사 후 맞이한 첫날은 달랐습니다.

미리 꺼놓은 알람에도 눈이 떠졌지만, 서둘러 옷을 챙겨 입어야 할 필요도, 날 기다리는 동료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창밖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낯선 이들의 분주한 출근길을 바라보며 묘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잠시, 이내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막막함이 밀려왔습니다.

이제는 조직의 보호 없이, 오직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현실이 무섭게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

회사 이름 뒤에 숨어있던 나의 진짜 정체성

퇴사하며 챙겨 나온 짐들 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름보다 크게 새겨진 회사명을 손가락으로 가려보았습니다.
마치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이름 앞에 붙어있던 직급도 마저 가렸습니다.
외롭게 남은 이름 세 글자가 이상하게 낯설고 제법 초라해 보였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면, 늘 나를 증명해주던 회사명과 직급 없이 어떻게 나를 소개해야 할까?

아기 손바닥만한 명함 하나보다 나라는 사람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회사에 있는 동안 이 명함 한 장이 주는 안락함에 취해, 언제까지나 지금의 삶이 유지될 것이라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불안했던 날, 가장 먼저 점검한 3가지

감상에 젖어 있기엔 현실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다행히 지금이라도 차가운 현실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그동안 근로소득으로 만든 자산을 어떻게 배분하고 리스크를 방어하며, 매달 현금 흐름을 만들어낼 것인지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우선 최소한의 생활비를 계산하고, 소득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을 가늠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산 전체를 펼쳐놓고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과, 그렇지 않은 자산을 구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막연한 불안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숫자로 확인되는 순간,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씩 숫자들을 점검하다 보니 또 하나의 사실이 또렷해집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자연스럽게 증가하던 소득이, 다시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퇴사와 동시에 마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마치 당연하게 이어질 거라 믿었던 탄탄한 길이, 눈앞에서 뚝 끊겨버려 절벽을 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누렸던 현금 흐름은 회사라는 시스템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었고, 그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그 수준의 소득은 다시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제는 스스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제가 가장 먼저 정한 것은 단순했습니다.

  • 6개월 이상을 버틸 수 있는 현금 확보
  • 가급적 현금화가 어려운 비유동자산에 손대지 않기
  • 소비 수준 낮추기

이 세 가지였습니다.

특히 가장 먼저 손봐야 할 것은 소비 수준이었습니다.
소득이 정점에 올랐을 때 함께 높아진 소비는, 퇴직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려는 순간, 자산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무너집니다.

소비를 줄이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익숙해진 소비습관이 아니라,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불편한 감정이었습니다.
당연하게 누리던 생활을 내려놓으려 하자 괜히 위축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을 미루는 순간, 자산은 더 빠르게 줄어들고 결국 더 큰 불안과 자존감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들

그렇게 하나씩 정리해 나가다 보니, 한 가지가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스스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이 들어오는 구조’ 안에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연한 답을 급하게 찾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선택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당분간 소득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현금 수준을 확인했고,
살고 있는 집 등 비유동 자산에는 손대지 않기로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한 가지를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퇴사 후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아내, 아들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향해 걸어가는 세 가족의 모습을 묘사한 연필 스케치 일러스트

그동안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버텨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회사와 집만을 오가며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있으니 됐다’고 믿고 있던 저와,

혼자 육아와 가사를 감당하며
지쳐 있었을 아내,

그 사이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외로웠을 어린 아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는 못했던게 아닐까.

그래서 저는
소비를 줄이기 전에,
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 전에,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그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온 가족과
같은 시간 속에 있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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